최세윤의병대장 생애

 

 

공적개요


공적개요
1. 1896년 의병 400을 규합하여 안동의장 김도화 진중에 들어가 오장이 되어 활동한 후 산해하다. (폭도편집자료 27호 p.73)
2.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재거, 영천의장 정용기와 합세하여 도찰사 정환직과 모의활동하다. (폭도편집자료 27호 p.73)
3. 1908년 정환직 사후 의병장이 되어 청하, 청송, 영천, 의성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나 일본의 현상금 수색으로 피체 (영남출신 독립운동약전 1집 p.223) . 대구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다.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등본)
8년 복역 후 단식순국하다. 장자 최산두도 부공의 소재를 알리지 않았다 하여 피체 끝내 함구하다가 옥중에서 순사하다. (영남출신 독립운동약전 1집 p.223)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특히 병서를 즐겨 읽어 정통하였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절의(節義)를 숭상하였으며, 흥해군의 형방서기(刑房書記)를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 부하 3백 명을 영솔하고 맹렬히 활약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인으로부터 시해를 당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거의토적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규합을 적극 주선하여 의병 3~4백 명을 인솔하고 안동의병장 김도화(金道和) 의진에 입진하여 아장(亞將)에 임명되었다.

 적을 공격하여 군세를 크게 떨쳤으나 무기가 불충분하고 훈련이 부족하여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적군이 대거 증원됨에 항전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자, 의병장 김도화와 상의하고 재기할 것을 기약하면서 일단 의진을 해산시켰다. 그후 향리로 돌아와 고향인 계림에서 2세 교육과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재차 거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이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거의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용기가 이한구(李韓久)를 파견하여 거의할 것을 요청하므로 즉석에서 찬성하고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다. 때마침 정환직이 내려와 있으므로 4인이 함께 거의방략을 논의하고 같이 거의할 날짜 등을 약속하고 돌아가 준비를 서둘렀다. 이로써 산남의진(山南義陣)이 편성되었으나, 산남의진이 거의할 때 마침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신음하게 되어 입진하지 못하여 통한을 달래고 있었는데 정용기 등 다수의 의병이 입암(立岩)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달려갔으나, 다행스럽게도 정환직이 그 잔병을 수습하고 영솔지휘한다 하므로 신병 치료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환직이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병석을 박차고 일어나 "나라일이 위급한 이때에 내 어찌 일신을 아끼고 종사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겠는가. 또 어찌 친구와의 맹약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나도 죽어서 보답함이 마땅하니 왜적과 싸워 죽겠다."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갔다.

  1908년 2월 부장 이세기(李世紀)·정순기(鄭純基) 등은 주장 잃은 의진을 수습하여 보현산(普賢山) 속에 주둔하고 있다가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장이 된 그는 전군을 영솔하여 흥해·청하·청송·영해·영천·의성 등지에서 활동하며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에 모여든 의병이 5백여 명에 달하였고 군세가 크게 떨쳐 승승장구하였으나, 의성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적은 의병대토벌전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때이었으므로 전국의진이 거의 패몰하고 고립되어 형세가 자못 불리하게 되어갔다. 이에 부득이 피신하여 재기할 준비를 하였다. 적은 최세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사망을 펼쳤다. 결국 장발면 내남면 용동(長髮面 內南面 龍洞)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청하 헌병대로 압송되던 중 다음과 같은 시 한 귀를 읊어 그의 충절을 도모하였다. 나라가 깨어지고 집이 망한지 벌써 몇 년인가. 한 가닥 실오라기 같으니 푸른 하늘이 부끄럽다. 장부가 이에 이르러서야 돌아갈 바를 알겠구나 은나라는 백이·숙제가 있으며 주나라는 연(連)이 있구나. (國破家亡已過年 尙存一縷愧蒼天丈夫自此知歸所 段有夷齊周有連) 그후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내손으로 목숨을 끊고자 하여 물속에 몸을 던졌으나 일헌병과 주구 김영준(金永俊)이 급히 뛰어들어 구출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악에 바친 일헌병이 구타하려고 하므로 "내 나라를 내가 찾으려 하는 것이 무슨 죄이냐. 비록 죄가 된다 하여도, 나를 죽일지언정 내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리라." 하고 호통을 치니 잔학무도한 일헌병조차 그 대의에 눌려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1911년 11월 15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10년의 징역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2월 12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된 뒤 그곳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거절하고 부인이 넣어 주는 사식만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사식마저 거절하고 단식 항쟁하다가 1916년 8월 9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
산남창의지(하권) 33·3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98·400·576면

의병대장의 생애

의병대장의 생애
崔世允義兵大將 行蹟과 精神

1) 出生과 氣像

崔世允의 字는 聖執, 號는 農皐, 貫鄕은 興海이다, 始祖의 諱는 湖이니, 高麗 檢校大將軍曲江府院君이다, 高祖의 諱는 弘晋, 曾祖의 諱는 昌憲, 祖의 諱는 宅奎다, 考의 諱는 再淳이니 草溪 鄭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시 月城崔氏)맞이하여 그 사이에서 世允은 1867年11月10日 興海曲城里에서 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氣像이 뛰어 났으며 일찍이 孫吳의 兵書를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天文, 地理, 陰陽 卜筮의 術을 窮究하고 治亂興亡의 自取를 推理하였다, 일찍이 學文을 익히고 선비정신을 追求하며 文武兼全의 姿勢를 見地하였다. 弱冠 以後부터는 敎育에 뜻을 두고 傍 先祖인 農叟先生 鶴林講堂에 地方 子弟들을 모아놓고 經史諸篇의 學問과 敎養을 가르쳐 일대에 名望이 높았다, 그러한 가운데 興海郡의 鄕吏를 歷任하였다, 平素“百姓은 나라의 根本이 되고 선비는 나라의 元氣가 된다”라고 하며 선비의 道를 밝혔다. 鶴林講堂에 있으면서 고을의 秀才들을 敎導하면서 天運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며 族兄인 洪植으로 더불어 傍祖되는 農叟 公의 散逸된 遺稿들을 收集하여 續集을 刊行하였다. 한 때의 文士인 朗山 李垕, 耆石 黃鎭燮, 復齊 張泰欽, 石儂 鄭鎭伯, 梅下 趙性穆, 進士 崔浩然등과 함께 志氣가 相通하여 唱酬하였다.

2) 處變三事의 具現

(1) 前期義兵 參加: 興海 에서 鄭來義 등 義兵 수백명으로 擧義하여 安東義陣 金道和 義陣에 參與하여 亞將의 職責(安東義陣 左翼將)을 맡아 活動 하였으며 禮安의 義兵將 香山 李晩燾와 連結되어 軍務를 議論하여. 信任을 받기도 했다.

(2) 中期와 後期義兵 參加 : 崔世允은 山南義陣의 興海地域 活動責任者로 活動, 卓越한 戰術로 數次의 戰鬪를 勝利로 이끌어 山南義陣의 威勢를 크게 振作 하였으며, 특히 1907年 9月과 10月의 2次 興海 戰鬪에서 100여명의 義兵을 거느리고 興海 分派所를 攻擊하여 敵을 砲殺하고, 武器를 押收하고, 分派所를 燒却하는 큰 戰果를 거두었다.

(3) 第3代 義兵大將 就任

1908年 2月 3日(陰曆 1月 2日) 永川郡 紫陽面 普賢山에 있는 巨洞寺에서 只今껏 義兵鬪爭을 하다 殉節한 英靈들의 慰靈祭와 함께 崔世允을 새로운 山南義陣 3代 大將으로 推戴되어 이로써 第4次 義陣이 구성된 것이다. 崔世允은 地域事情에 밝고, 地形의 利點을 十分 活用할 수 있는 該當 地域出身 義士를 中心으로 組織

을 改編 當初 目標인 關東으로의 北上作戰을 修正 慶尙道一帶만

으라도 據點을 確保해 持久戰을 펼치기로 作戰을 變更, 주로 本部로 利用한 北東大山, 普賢山 一帶에서 本部는 南東大山을 中心으로 慶州, 蔚山, 興海, 浦項地域을 擔當하면서 各 地帶를 總括하고 各 地帶는 責任者를 選定하여 本部와 連絡하며 遊擊戰을 펼치는 計劃으로 變更하였다,

(4) 義兵大將의 殉國 : 1911年 9月 長鬐 龍洞에서 잡혀, 1911年 大邱地方裁判所에서 10年刑의 言渡를 받고 서울 西大門刑務所에서 5年의 獄苦와 11日間의 斷食 鬪爭 끝에 1916年 8月 9日에 殉國하시었다.

(5) 輓 詩

顔張班列魯田隣(안장반열노전린)

안고경(顔杲卿) 장순(張巡)의 반열에 노중연(魯仲連)과 전횡(田橫)을 이웃하였으니

義擧東方首倡人(의거동방수창인)

동방에서 창의한 사람 중에 으뜸일세.

誓死心何同草朽(서사심하동초후)

죽음을 맹세한 마음, 어찌 초목과 함께 썩으랴!

旌忠典應自天臻(정충전응자천진)

충의로 보상받은 은전은 하늘에 이르렀네.

知音荷字初逢日(지음하자초봉일)

知音(知己之友)은 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에 그대에게 받았고

家事付吾再見春(가사부오재견춘)

나에게 남은 일을 부탁한 게 두해 봄이 지났구나.

疆土三千猶未復(강토삼천유미복)

삼천리강토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靑山幾處埋君身(청산기처매군신)

청산 어느 곳에 그대를 묻어야 하나.

黃猿暮春 義弟 曲江 崔世翰 哭輓

의병동생 곡강 최세한(세윤)은 哭하고 만장하다.

※( 崔世允이 親筆로 쓴 李漢久의 輓章은 獨立紀念館에 所藏 됨)

(6) 逮捕되어 靑河憲兵 分隊로 押送되는 途中에 다음과 같은 詩 한 수 지음

國破家亡已有年

나라가 파하고 집이 망한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尙存一縷愧蒼天

아직도 실 날 같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늘에 부끄럽도다.

丈夫自此知歸所

대장부 이로부터 돌아갈 곳을 알았거니

殷有夷齊齊有田

은나라에 백이숙제가 있고 제나라에 전횡(田橫)이 있었네.

(7) 處變三事 具現(倭敵의 侵入 등으로 나라가 危急할 때 선비 가 해야 할 세가지 使命)

①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움)

②去而守之: 절개를 지키기 위해 망명)

③自靖致命: 스스로 목숨을 끊음) 中 (1)과 (3)을 具現.

3)天下三絶 : 忠. 烈. 孝) 實現

(1) 崔世允大將의 忠, 婦人 尹英德 女史(1868 - 1912)의 烈,

큰 아들 山斗(1888 - 1912)의 孝.

(2) 1968年 3月1日 建國勳章 國民章을 追敍하였으며 1976年 10 月 興海 松鶴洞(現鶴田里)의 崔世允 義兵大將과 婦人 尹 氏의 墓를 함께 서울 東雀洞國立墓地로 옮겨 安葬하였다.

(3) 어린아이를 업은 채 大邱와 西大門刑務所 周邊에서 품팔이 하 여 私食을 올렸고, 남편이 殉國하자 손수 염습하고 屍身을 머리에 여서 千里 길을 露宿하면 서도 잠시도 땅에 내려놓지 않고, 간신히 故鄕에 返葬하고 나서 얼마 후 男便을 위해 魂神의 뒷바라지를 한 부인 尹英德 女史도 男便이 죽은 이듬해 7月1日 死亡하였다.

(4) 큰 아들 山斗 역시 義兵活動으로 檢擧되었다, 當時 21세였던 山斗는 어린 나이임에도 義陣의 軍資金 募集 活動을 擔當하였 다, 崔山斗는 日軍警의 審問에도 屈伏하지 않고 아버지 崔世允 의 所在를 緘口하다가 1908年 9月30日 大邱地方裁判所에서 終 身 懲役刑을 받고 1912年 9月9日 끝내 大邱監獄에서 殉 國하였 다. 2017年 11月 17日 建國勳章 愛國章을 追敍하였다.

(5) 이러한 崔世允 義兵大將 一家의 天下三絶의 具現은 浦項精 神의 師表로서 子孫萬代의 貴敢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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